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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란

제례의 변천
조선시대 유교식으로 정착된 제례

조선시대 유교식으로 정착된 제례

  • 조선시대 유교식으로 정착된 제례
  • 오늘날까지도 유교식으로 전통화되어 내려오는 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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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식 전통으로 안착되기까지, 제례의 변화한국에 정착된 유교식 제사는 이미 중국에서는 기원전부터 존재했었다. 이러한 유교식 제사는 고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이르러 그 명맥이 약해졌다. 통일신라와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삼아 모든 의례를 불교식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고려 말 중국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수입하면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수입되었고 이는 쓰러져 가는 고려를 재건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정몽주(鄭夢周) 등이 유교식 의례실천을 주장하였으나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모든 의례의 유교화가 진행된 조선조선이 건국된 후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기존의 불교 의례를 배척하고 모든 의례를 유교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선 초기에 이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여 의례의 규범으로 삼고, 세부적인 규정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위치한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공파(靑溪公派) 문중에서 전해오는 1581년(선조 14)에 작성된 「문중완의문(門中完議文)」에 의하면 상당히 빠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유림들은 3대봉사를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유교식 의례가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조선 의례문화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그런데,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 의례문화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 된 조선반도를 재건하는 데에는 종교적 성향이 약해 보였던 유교 이데올로기가 적당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 의례의 경우 기존의 의례문화를 유교식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4대봉사가 일반화된 1700년대제사에서 4대봉사가 일반화 된 것은 1700년대로 보인다. 1752년(영조 28) 현빈(賢嬪)의 복제(服制)를 대공복(大功服)에서 기년복(朞年服)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아! 향곡(鄕曲)의 서인(庶人)도 4대(代)를 봉사(奉祀)하는 법인데 하물며 대통을 이어 주창(主鬯)하는 주자(胄子)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4대봉사가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제례문화는 유교식으로 정착되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의례문화의 전통은 유교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편화, 문화적 전통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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