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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란

혼례의 변천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혼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혼례

  •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혼례
  • 주자의 가례를 기본으로 한 유교식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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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는 혼인의 역사우리나라 혼례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이는 인류의 혼인역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고, 이에 따르는 의례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혼례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대사회의 다양한 기록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유교식 혼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교식 혼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고대사회의 기록『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가실(嘉實)이 설씨(薛氏)의 아버지로부터 혼인 허락을 받은 후 설씨에게 혼인할 날짜를 청하자 설씨는 “혼인(婚姻)은 인간의 큰 윤리(倫理)라 창졸간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라고 답한다. 이 기록에서 청혼과 혼례 날짜를 선택하는 절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삼국시대에는 『예기(禮記)』가 도입되어 읽히고 있었기 때문에 고전적인 유교식 혼례절차가 일정 부분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등장하는 고대의 혼례 기사는 당시의 혼례 성격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한다. 예(濊)에서는 “동성(同姓) 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옥저에서는 “『위략(魏略)』에서 말하기를 그 혼인법에 여자가 열 살이 되면 혼인을 약속하고 서로 허락하여 사위의 집에서 며느릿감을 맞아들여 오랫동안 양육하여 며느리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친정에 보내 혼수 돈을 마련하게 하여 돈이 마련되면 다시 시집으로 돌려보낸다.”라고 하여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부여(夫餘)에서는 “남녀는 모두 음하고 부인이 투기(妬忌)를 하면 모두 죽였다. 그리고 투기가 매우 심하여 사형을 당하면 그 시신을 남산(南山) 위에 갖다 버렸다. 여자의 집에서 딸의 시신을 가져가려 하면 우마(牛馬, 소나 말 등의 가축)를 주어야 하였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흉노의 풍속과 같다.”고 하였다. 이 기사에서 부여는 이미 부권제(父權制) 사회로 이행되었으며, 가장권(家長權)이 강해진 부권적(父權的) 가족제도 하에서 부인은 인격체로 인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여자의 정조관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혼례의 근간이 된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의 서옥제 혼속고구려(高句麗)에서는 “혼취(婚娶)의 예(禮)는 재물과 폐백을 주는 일이 없고 만약 재물과 폐백을 받는 자가 있으면 여종으로 팔았다고 하며 세속에서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하여 혼인의 예가 있었고, 재물을 교환하지 못하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그 풍속에 혼인을 할 때는 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는 큰집[大屋] 뒤에 작은 집[小屋]을 짓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고 한다. 저녁이 되면 사위가 여자의 집에 와서 문 밖에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꿇어 앉아 절을 하면서 여자와 함께 자게 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2-3회 하면 여자의 부모가 서옥에 들어가 자게 한다. 옆에는 전백(錢帛, 금전과 폐백)을 놓아둔다. 아이를 낳아 장성하게 되면, 비로소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말로 미리 정한다.”는 것은 ‘의혼(議婚)’의 절차로 간주할만하다. 그리고, 서옥제에서 중국식의 친영(親迎)을 하지 않고, 신랑이 신부집에서 예식을 치르고, 일정 기간(아이를 낳은 다음)이 지난 다음에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가는 우귀(于歸)를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친영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식의 혼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해모수(解慕漱)와 하백의 딸 유화(柳花)의 혼례에서 중요한 절차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배우자의 선정 때 자유혼의 관념이 있고, 이것이 하나의 절차로 인정된다. 둘째는 배우자는 자신들이 결정하지만 혼인은 부모의 허락을 받는 절차가 있다. 셋째 허락을 받으면 예를 갖추어 혼례를 치른다. 넷째 혼례를 치르면 참석자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찬치를 한다. 다섯째 신부의 집에서 첫날밤을 치른다. 여섯째 왜 혼자 하늘나라로 간 것인지 당위성은 없지만 해모수는 동침을 한 후 유화를 남겨두고 혼자서 하늘나라로 간다. 일곱째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고행을 겪으면서 기른다. 이처럼 해모수와 유화의 혼례는 대략 이러한 절차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혼인예식이 어떠한 형태로 진행되는지는 모르지만 일정한 절차로 혼례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서옥제(婿屋制), 혹은 서류부가형(婿留婦家型), 솔서혼속(率婿婚俗), 처가혼(妻家婚, Matrilocal Marriage) 등으로 불리는 고구려의 혼속이 우리나라 혼례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전통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려 말 이후 중국에서 『가례(家禮)』와 함께 유입된 친영제도(親迎制度)가 우리나라의 문화에 정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통일신라의 혼례 전통신라에서는 “혼인의 예는 오직 술과 밥을 해서 나누어 먹는 것뿐인데, 잘 차리고 못 차리는 것은 그 사람의 살림살이의 형편 따라서 한다. 새로 혼인한 날 저녁에는 여자가 먼저 시부모에게 절을 하고 다음으로 형과 지아비에게 절을 한다.”라고 하여 혼인의례의 절차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혼인의례에 술과 음식뿐이라’고 한 것은 정해진 혼인예식을 치른 후에 ‘술이 동반되는 잔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잔치를 마치면 시댁 식구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현구고례(見舅姑禮)를 연상시키는 절차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에서는 신문왕(神文王, 681-692)이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비(妃)로 맞이할 때의 사례를 통해 상당히 성대한 혼례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왕은 우선 이찬(伊湌) 문영(文穎)과 파진찬(波珍湌) 삼광(三光) 등의 세 사람을 보내어 길일을 정하고, 대하찬(大阿湌) 지상(知常)을 보내 납채(納采)를 하였는데, 폐백(幣帛)이 15수레,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식혜 등이 135수레, 벼가 150수레였다. 이찬 문영과 개원(愷元)을 여자의 집으로 보내 김씨를 왕비로 책봉하고, 파진찬 대상, 손문(孫文)과 아찬 좌야(坐耶), 길숙(吉叔) 등에게 명하여 각각의 처낭(妻娘)과 급량(及梁)⋅사량(沙梁) 이부(二部)의 부녀 30명을 데리고 부인을 맞이하여 왔는데, 좌우의 시종(侍從)하는 관원과 여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통일신라 때 왕실에서는 이미 중국의 의례가 유입되어 실행되고 있었고, 이것이 민간의 식자들에게 보급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또한 신라에서는 왕족은 계급내혼(階級內婚)과 함께 근친혼(近親婚)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첩의 제도가 있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백제와 진한의 혼례 전통백제(百濟)와 진한(辰韓)의 혼인이나 혼례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어 혼례가 어떠한 형태로 행해졌는지 알 수가 없으나 진한에서는 “혼인을 예로 행한다.”라고 하여 혼인의 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백제의 혼례에 대해서는 “중국의 풍속과 대략 같다.” 혹은 “고구려와 같다.”고 한다. 이때의 예(禮)는 『예기』에 근거하거나 『의례(儀禮)』에 근거하였을 가능성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풍속이 비슷하였고, 중국의 예법을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어 유교식 혼례의 편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식 혼례방식과 다양한 형태의 혼레가 공존되었던 고려시대고려시대(高麗時代)가 되면 제도적으로는 유교식 혼례방식을 채택하지만 실제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혼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불교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조가 되면 중국의 삼례(三禮)인 『의례』, 『주례』, 『예기』를 수입하는 등 중국의 고례(古禮)가 본격적으로 수용되면서 전통의례와 유교적인 의례가 공존하는 과도기를 겪게 된다. 고려 초에는 송으로부터 대묘당도(大廟堂圖), 제기도(祭器圖) 등 의례와 관련된 그림들을 가져왔으며 성종(成宗) 대에는 국가의 주요제도를 유교적으로 개편하는 등, 중국의 유교가 내용 면으로나 의례적으로나 본격적으로 고려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생각해 볼 때 『예기』 등의 중국식 의례에 의거한 유교식의 일생의례가 왕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실행되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혼인에 관한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관혼상제는 예(禮)를 따르는 것이 적다.”라고 하여 고려의 의례가 빈약함을 지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귀인이나 선비 집안에서는 혼가(婚嫁)에 빙폐(聘幣, 혼인 때 공경의 뜻으로 보내는 예물)를 쓰나 백성에 이르러서는 다만 술이나 쌀을 서로 보낼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예물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의 유풍이 있어 경종(景宗)이 4촌과 혼인하는 등 근친혼이 성행하였다.

친영의 예 대신에 서류부가혼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진 고려시대 혼례사회구조를 유교식으로 바꾸려 했던 고려사회에서 혼인에 대한 규정과 절차들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나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서류부가혼이 일반적이어서 여자의 집에서 혼인예식를 치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친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옛날엔 부인을 맞이할 때 부인이 남편의 집으로 시집오게 되어, 그 부인의 집인 처가를 의뢰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장가갈 때 남자가 처가로 가게 되어 무릇 자기의 필요한 것을 다 처가에 의거하니 장인(丈人)⋅장모(丈母)의 은혜가 자기 부모와 같다 하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규보가 장인의 장지(葬地)에서 올린 제문(祭文)으로 문맥상 자신이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학문을 할 수 없었을 때 장인의 은덕으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당시의 제도를 거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행하던 친영의 전통은 없어지고, 12-13세기에는 서류부가의 풍습이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은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 「혼인편(婚姻篇)」을 기술하면서, “친영(親迎)의 예(禮)가 폐지되어,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부인이 무지하여 자기 부모의 사랑을 믿고 남편을 경멸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며, 교만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서 마침내는 남편과 반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가도(家道)가 무너지는 것은 모두 시작이 근엄하지 못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라고 혼의편(婚儀篇)의 저술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친영의 제도를 정착시켜 가도를 지키기를 기대하는 내용이다.

왕실을 중심으로 일부 이루어졌던 친영이러한 기록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의 내용을 통해 왕실에서는 친영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례-왕태자납비의(嘉禮-王太子納妃儀)」에는 친영을 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혼인을 채택하고 날을 잡는 등의 일은 모두 일반적인 의례와 같이 하여 절차를 마친다. 그리고 혼례를 올리는 날이 되면 초자례(醮子禮)를 행하는데, 왕이 왕태자에게 왕태자비를 맞아하여 와서 종사를 이으라고 하면, 왕태자는 이를 받들겠다고 하고 나간다. 그리고 임시로 마련한 막차에서 비(妃)를 맞이하여 와서 초례를 치른다. 그리고 합방을 하고, 다시 왕태자비가 왕에게 배알하는 의례와 책비의례(冊妃儀禮)들이 이어진다. 이 예는 왕실의 혼인이었기 때문에 왕태자비로 간택된 사람이 임시 거처로 오고, 거기서 왕태자가 친영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충헌의 아들 성(珹)이 희종(熙宗)의 딸과 혼인을 할 때 친영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왕태자와 공주의 혼례에서만 친영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흥미롭다. 앞선 예로 미루어보아 고려시대에는 친영제가 널리 행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는 계년(笄年, 계례(笄禮)를 하는 해)에 이르러 평장사(平章事)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지효(之孝)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혼례를 치르는 날 저녁에 지효가 문에 이르렀다. 그런데 비(妃)가 갑자기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이에 사과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친영을 하기 위해 신랑이 신부집으로 온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예식을 치르기 위해 온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혼례는 기록이 분명치 않아 혼례가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려시대에 이미 유교적인 이데올로기가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상당 부분이 유교식 의례로 전환되어 갔다. 그러나 혼례의 경우에는 왕실의 경우에만 친영제를 도입하는 혼례법을 수용하고 있고, 일반 사서인(士庶人)의 경우는 전통적인 혼례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자의 『가례』를 기본구조로 개혁하려고 했던 유교식 관혼상제1290년(고려 충렬왕 16) 중국으로부터 성리학과 함께 수입된 주자의 『가례』는 집이라는 단위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개인의 일생의례를 의례의 기본구조로 삼기에 충분했었다. 즉 주자의 가례가 유입되기 전까지의 일생의례 체계는 『의례』나 『주례』, 『예기』에 산발적으로 수록된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이색(李穡, 1328∼1396)과 함께 학식(學式)을 고치고, 사서들도 주자의 가례에 따라 가묘를 세워 봉사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은 사전법(祀典法, 국가의 제사제도)을 새로 제정하여 100일상의 불교식 상례법을 3년상의 유교식 상례법으로 바꾸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 기제(忌祭)는 반드시 주자의 『가례』에 준하여 행하도록 규정하였고, 1391년에는 『대명률(大明律)』을 바탕으로 상기(喪期)를 3년으로 정하였다. 이처럼 성리학의 이론과 의례 실천에 관심을 둔 학자들은 상제례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초기부터 국가권력이 앞장서서 성리학적 의례체계의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조선조에서 일생의례의 유교적 개혁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가례』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 고려시대에서 개혁하려 하였던 상제례 뿐만 아니라 관례와 혼례를 포함하고 있었다.최초의 개혁 작업으로 1395년(태조 4년) 권근(權根)에게 명하여 관혼상제를 상정하도록 하고, 1398년(태조 7) 예조(禮曹)의 건의로 불교식 제례를 폐지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따라 절에서 올리던 재(齋)를 금하고 집에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470년(성종 1) 화장을 금하고 유교식 상례와 매장을 권하는 등 계속적으로 성리학적 의례체계를 장려하는 정책이 이어진다.

성리학자들의 예서 출간으로 정착된 유교적인 제도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주자의 가례를 기본 모델로 하여 유교적인 관혼상제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그 기틀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 초기에 전 계층으로 일반화 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제도로 자리 잡고 서민에게까지 일반화된 것은 조선 전시대를 통틀어 계속적으로 추진한 국가의 제도적 조처와 함께 예에 관심을 둔 유학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예서출간은 가례를 유교적인 제도로 바꾸어서 정착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469년(성종 1)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 시행되고,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완성되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에는 유교식 혼가례(婚嫁禮), 제례, 상례를 포함하고 있고, 외친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고 있다. 『국조오례의』에는 시향의(時享儀), 관의(冠儀), 혼례의(婚禮儀), 상의(喪儀)를 포함하고 있어 당시까지 상제례에 국한된 의례정책에서 관혼상제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관례와 혼례가 본격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거론된 것은 16세기 말경부터 17세기 초로 보인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가례집람(家禮輯覽)』, 조호익(趙好益, 1545-1609)의 『가례고증(家禮考證)』,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사례훈몽(四禮訓蒙)』 등 이 시기에 편찬된 예서들부터 관례와 혼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당시에 『가례언해(家禮諺解)』가 출간된 것을 볼 때 당시 관혼상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유교적인 일생의례의 규범을 우리말로 쉽게 풀이함으로써 일반 서민들에게도 가례를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책이기 때문이다.『가례』를 기본으로 하는 관혼상제의 절차, 의미 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17세기부터 18세기 말기까지로 이어진다. 이의조(李宜朝, 1727-1805)의 『가례증해(家禮增解)』, 박성원(朴聖源, 1697-1757)의 『예의유집(禮儀類輯)』, 유계(兪棨, 1607-1664)의 『가례원류(家禮源流)』 등 많은 저서들이 『가례』를 넘어서서 고례(古禮)까지 인용하면서 의례의 심층적인 분석을 시도한 수준 높은 예서들이 나왔다. 이처럼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모두 예학자(禮學者)라고 할 정도로 예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이 성리학적인 일생의례체계를 조선사회에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국조오례의』에서 규정하고 있는 다양한 혼례의 규정『국조오례의』에서 규정하고 있는 다양한 혼례의 규정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책왕세자빈의(冊王世子嬪儀)라고 한 왕세자의 혼례는 다음과 같다. ① 왕세자의 빈(嬪)을 정식으로 책봉하는 책봉의식(冊封儀式)인 책왕세자빈의. ② 혼례의 첫 번째 절차로서 빈의 집에서 왕세자 측의 혼인의사를 받아들이는 납채(納采). 왕세자가 사자(使者)를 시켜서 빈의 집에 납채하는 의례이다. ③ 책빈(冊嬪) 등 실질적으로 혼인이 이루어졌으므로 그 징표로서 신부 측에 예물을 보내는 납징(納徵). ④ 왕실에서 빈의 집에 혼례 날짜를 정하여 보내는 고기(告期). ⑤ 혼례를 치르게 된 것을 종묘(宗廟)에 고하는 고종묘(告宗廟). ⑥ 빈을 책봉하는 의례인 책빈(冊嬪). ⑦ 친영을 위해 출발하는 신랑에게 주인이 마루에 나가서 주의사항을 일러 주는 등의 일을 하는 임헌초계(臨軒醮戒). ⑧ 왕세자가 빈을 친히 데려오는 의례인 친영(親迎). 빈의 집에서 전안례(奠雁禮)를 행하고 신부와 함께 우귀(于歸)한다. ⑨ 친영한 후에 교배와 합근을 하고 신방을 차리는 동뢰(同牢). ⑩ 친영한 다음날 세자빈이 왕과 왕비를 알현하는 빈조현(嬪朝見). ⑪ 백관들이 왕 앞에 모여서 왕세자의 혼인을 축하하는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등 11개 절차로 진행된다.

왕세자를 제외한 왕자와 왕녀의 혼례 절차한편 왕세자를 제외한 왕자와 왕녀(공주)의 혼례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왕자의 경우는 납채, 납폐, 친영, 동뢰, 부인조현(夫人朝見, 왕자의 부인이 시부모인 왕과 왕비에게 폐백을 올리는 절차), 대군현부인지부모(大君見夫人之父母, 왕자가 부인의 부모를 뵙는 일) 등 6개의 절차로 진행된다. 그런데, 왕세자와는 달리 왕자의 경우는 대군이기 때문에 왕자가 직접 부인의 부모, 즉 장인을 알현하러 가는 절차가 있다. 왕녀의 혼례는 납채, 납폐, 친영, 동뢰, 공주현구고(公主見舅姑), 공주현사당(公主見祠堂), 서조현(婿朝見)의 7개 절차로 진행된다. 공주의 현구고는 왕자의 혼례에서 왕자의 부인이 왕과 왕비에게 올리는 폐백과 대비되는 의례이다. 그리고 공주현사당은 공주가 남편이 될 부마집의 사당에 알현하는 의례이고, 서조현은 사위가 4일 만에 사위가 대궐에 나아가서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네 번 절하는 예(禮)를 행하면, 음식물을 내려 준다. 그 다음에 동궁(東宮)에 나아가서 예를 행한다. 그리고 이를 마치면, 공복(公服)을 벗고 차례대로 종친의 여러 존장(尊長)을 뵙고 음식을 접대 받는다. 「종친 및 문무관 일품 이하 혼례」는 좀 더 서민적인 특성이 배여 있다. 순서를 보면 납채, 납폐, 친영, 부현구고(婦見舅姑), 부현사당(婦見祠堂)의 절차로 되어 있다.

국가의 친영 의례 보급 노력과 민간의 서류부가혼 전통 고수조선시대의 모든 의례는 유교식으로 정해진 형식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혼례는 주자의 『가례』에 따르기도 하였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고례(古禮)를 찾아 『예기』나 『주례』의 혼례를 따르려는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친영이라는 절차이다. 친영이란 말 그대로 “신랑이 친히 신부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친영은 중국에서 유입된 혼례의 방법이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은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는 서류부가(婿留婦家) 형태를 따르고 있어 중국의 것과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조선 후기가 되면 반친영(半親迎)이라는 절충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유교식 친영은 신랑측 중심으로 의례가 진행된다면, 서류부가형은 양가를 공히 중요시하면서 진행된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친영의 보급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류부가혼이 총체적인 문화적 현상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조선시대에 와서는 혼례에서 친영을 일반적 절차로 정착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찾아보면 왕실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친영을 했던 반면 일반인들의 경우 거의 친영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를 보면 세종 7년 5얼 12일(신사) “혼례는 여자가 남편의 집으로 가는 것인데, 나라의 풍속이 옛 습관에 젖어서 친영(親迎)하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므로 태종께서 혼례를 바르게 하시려다가 이루지 못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교(禮敎)는 오래 가야만 변할 수 있는 것이니 이제 처부모(妻父母)의 복제(服制)를 우선 개정하게 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즉, 친영을 적극 권장하지만 사람들이 친영을 행하지 않기에 이를 시정할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혼례는 당시까지만 해도 남자가 여자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일정 기간 머무르는 서류부가혼속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한민족의 전통적인 혼례방식이었지만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물론 중국의 고전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교화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전통적인 혼례를 지속시켜 왔고,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류부가혼속이 지속되어 왔음을 위의 기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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