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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여성의 예복에 갖추는 머리쓰개인 족두리족두리(簇頭里)란 여성의 예복에 갖추는 머리쓰개이다. 족두(蔟兜) 또는 족관(蔟冠)이라고도 한다. 족두리는 여섯 모가 난 모자에 검은 비단으로 싸는데, 모양은 위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진다. 안쪽에는 솜을 두고, 내부는 비게 하여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에 의하면 겹족두리라는 뜻으로 ‘겹관(袷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솜을 두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족두리라는 말은 고려 때 원나라에서 왕비에게 준 고고리(古古里)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족두리의 변천사원래 족두리는 머리 정수리에 만든 쪽을 감싸서 묶는 기능과 동시에 검은색 천으로 만든 일종의 실용적인 가체(假髢)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머리 장식으로는 여성들이 일할 때 머리를 정돈할 목적으로 쓰는 수건과 함께 의례에 사용하던 화관과 족두리가 그것이다. 19세기 이후 부녀의 쪽머리가 정착하면서 족두리는 의례에 참석할 때 쓰는 특별한 예관으로 정착하였다. 족두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원나라와의 혼인이 많았던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족두리는 조선시대의 것보다 모양이 크고 높이도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가 되면 좀 더 일반화됨과 동시에 크기가 작아지고, 둘레가 위와 아래가 비슷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현금(玄錦, 검은 색 비단)으로 싸고, 자주색으로 안을 대는 것으로 바뀌었고, 국내의 여성들이 즐겨 써서 거의 국속(國俗)이 되었다. 특히 영⋅정조시대가 되면 가체(假髢)의 폐해를 막기 위해 가체를 금지하면서 족두리와 화관이 장려되었다. 1788년(정조 12)이 되면 쪽머리를 하고 그 위에 족두리로 장식하도록 하였는데, 면이나 대나무로 모자를 만들고, 검은색을 칠하고, 칠보 등으로 사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혼례복을 입을 때도 칠보족두리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다양한 형태의 족두리족두리 위에는 남편의 관직에 따라 금권자(金圈子, 관자)나 옥권자를 붙여서 등위를 표하기도 하였다. 족두리는 장식의 유무에 따라 민족두리와 꾸민족두리가 있다. 꾸민족두리는 족두리 위에 옥판(玉板)을 받치고 산호주(珊瑚珠)⋅밀화주(蜜花珠)⋅진주 등을 장식한다. 그 외에 어염족두리라는 것이 있는데, 어여머리를 꾸밀 때 쓰는 것으로 솜족두리라고도 한다. 상주가 쓰는 흰색 역시 족두리라고 하는데, 장식이 없고, 납작한 모가 난 모자 모양이다.족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단 다섯 치와 솜 한 냥 반이 필요하다. 의례와 관련하여 족두리는 신부가 혼례복으로 원삼을 입을 때 쓰개로 사용되어왔으며, 요즘에도 신식 혼례 후에 폐백을 드릴 때 원삼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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