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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원류(家禮源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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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고도서
서명 가례원류(家禮源流) 저자 유계(兪棨)
발행연도 1714년(숙종 40) 권수 14권 8책
개요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조선 현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관한 주석과 사례를 분류 정리한 책이다. 숙종 때 책의 발간과 관련하여 유씨가문과 윤씨가문의 갈등이 심화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해제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연원[源]과 전개[流]를 밝힌 책이다. 즉 ‘『의례(儀禮)』, 『주례(周禮)』, 『대례(戴禮)』 이하 여러 경전’을 통해 『주자가례』의 연원을 밝히고 ‘후세의 여러 유현(儒賢)들의 예설(禮說)’을 수집하여 『주자가례』의 전개를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효종조(孝宗朝) 말에 완성되었으나 판각되어 배포되지 못하다가, 1713년(숙종 39)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아 시남 유계(市南 兪棨, 1607~1664)의 손자 상기(相基)가 권상하의 서문과 후서, 정호(鄭澔)의 발문을 붙여 1714년(숙종 40) 14권 8책으로 간행하였다. 유계의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여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시남집(市南集)』, 『여사제강(麗史提綱)』, 『강거문답(江居問答)』 등이 있다. 『가례원류』는 사계(沙溪) 『가례집람(家禮輯覽)』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저술이다. 즉 ‘경(經)’인 『주자가례』의 의미를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명료화하는 것이 본서의 기획의도라는 것이다. 다만 『가례집람』에 비하여 『예기(禮記)』와 『의례(儀禮)』 그리고 『주례(周禮)』 등 고례(古禮)의 내용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울러 『가례집람』의 ‘도식(圖式)’을 해당 부분에 재배치하고 있고 『가례집람』에 없는 도식을 새롭게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유계의 『연보』에 따르면, 병자 척화사건으로 임천(林川)에 유배중인 1638년(32세, 인조16)에 『가례집해(家禮集解)』를 찬술하고, 이듬해 3년 만에 유배가 풀려 금산(錦山)으로 이주를 하였다. 당시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와는 시내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고, 미촌은 13세의 아들 윤증(尹拯)을 시남에게 보내 사사케 했다고 한다. 『가례원류』가 완성된 것이 이 무렵이고 『가례원류』의 편찬에는 윤선거가 참여하여 도왔지만, 유상기가 간행하면서 시남의 단독 편찬으로 주장하였다. 이에 윤증은 그의 부친이 참여하여 도운 일을 들어 단독 편찬의 부당성을 주장함으로써 두 집안에 반목과 시비논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윤선거 쪽에서는 1775년(영조 51) 20권 10책의 목판본 『가례원류』를 독자적으로 간행하기에 이른다.